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브루클린 네츠 (문단 편집) === 암흑기 === NBA는 ABA 팀들에게 리그 입성금을 요구했는데, 이 입성금은 거의 500만달러에 육박했다. 하지만 아이스하키팀인 '[[뉴욕 아일런더스]]'까지 같이 운영하고 있던 구단주 로이 보는 저 500만달러를 전부 지불할 여력이 없었다. 이때 네츠에게 접근한 게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다. 식서스는 300만 달러를 지원해 줄 테니 '''줄리어스 어빙'''을 내놓으라는 요구를 했고,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던 네츠는 울며 겨자먹기로 어빙을 허무하게 조공하게 된다. 이때 어빙을 얻어낸 필라델피아는 [[윌트 체임벌린]] 이후 10년만에 파이널에 진출하고, 이후에도 [[NBA 파이널|파이널]]에만 세 번 진출하여 1983년엔 16년만의 우승도 맛보게 된다. 이렇게 NBA에 입성하기는 했다만, 에이스를 잃어버린 네츠는 새로 영입된 잔 반 브레다 콜프[* 전 LA 레이커스 감독 벗치 밴 브레다 콜프의 아들. 은퇴 이후 밴더빌트 대학교, 페퍼다인 대학교 등지에서 감독으로 커리어를 쌓았고, 2003년부터 1년 동안 뉴올리언스 호네츠 코치도 맡았다.], 존 윌리엄슨 등의 분전에도 불구하고 입성 첫시즌 22승 60패라는 참담한 성적을 거두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뉴욕 닉스]]의 압박도 더해갔다. 1977년에 로이 보 구단주가 앨런 N. 코헨과 조셉 타웁 등 뉴저지 향토사업가들을 주축으로 한 투자그룹 '시카커스 세븐'에 매각한 뒤, 팀명을 뉴저지 네츠로 변경했다. 다만 이것이 설득력이 없는 이유가, 네츠는 당시 쓰던 구장은 '''뉴욕 주''' 유니언데일에 있는 [[나소 베터런스 메모리얼 콜리시엄]](위에 같이 나온 아이스하키팀 아일랜더스도 같이 썼다.)으로 [[뉴저지]]와는 정반대인 [[롱아일랜드]]쪽에 위치한 구장이었다. 이것이 닉스의 영업지역 침범으로 간주되어, 네츠는 어쩔수 없이 낫소 콜로세움을 떠나 뉴저지의 주립대인 [[럿거스 대학교]]의 홈구장을 4년간 빌려쓰다가 1981년에야 뉴저지 주 이스트 러더퍼드의 브렌던 번즈 아레나(現 아이조드 센터)로 가게 된다. 그만큼 NBA의 ABA에 대한 압박과 견제는 치졸하게 보일 정도로 강했다.[* 리그 운영 면에서도 마찬가지인데, ABA가 남긴 3점 슛 제도와 슬램덩크 콘테스트도 1979년과 1984년에야 각각 NBA에 도입됐다.] 연고이전 첫 해인 1977년 드래프트에서 테네시 대학교 출신 버나드 킹을 전체 7번으로 뽑는 등 재건을 했지만, 1978-79 시즌을 빼곤 플레이오프는 한 번도 진출하지 못했으며 킹도 1979년에 유타 재즈로 떠났다. 1981년에 밥 매키넌 코치[* 1980-81 시즌 도중 감독대행을 맡았다.]가 단장으로 승진하자, UCLA 감독이던 래리 브라운에게 지휘봉을 맡기는 한편, 드래프트에서 메릴랜드 대학교 출신 벅 윌리엄스를 전체 3번으로 뽑아 새 판을 짰다. 윌리엄스는 자기관리를 통한 강인한 체력과 뛰어난 리바운드, 공격능력을 바탕으로 쉴새없이 뛰어가며 1983-84 시즌에는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전 시즌 우승팀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를 3승 2패로 떨어뜨렸으나, 2라운드에서 밀워키 벅스에게 2승 4패로 졌다. 그 사이 1985년에 조셉 타웁 회장은 지분 40%를 앨런 아우프지엔(Alan Aufzien) 등 공동주주 4명에게 팔았고, 아우프지엔이 회장 자리에 올랐다. 1985-86 시즌 이후 연이은 트레이드 및 드래프트 실패로 하위권에 또 머물렀다가, 1989년에 아우프지엔 회장은 윌리스 리드 감독을 운영부사장 겸 단장으로 승진시킨 후 명장 [[빌 피치]]를 감독으로 맞아들여 또 팀 재건을 시도했다. 이에 따라 벅 윌리엄스를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의 샘 보위 및 드래프트 픽 1장과 맞바꾼 뒤, 드래프트에서 오클라호마대 출신의 'The Thief' 무키 블레이락을 전체 12번으로 뽑았다. 1990년 드래프트 때 시라큐스 대학교 출신 데릭 콜먼을 전체 1번으로 뽑고 1990-91 시즌 도중에 포틀랜드, 덴버와 3각 트레이드를 벌여 포틀랜드로부터 '동유럽의 조던' [[드라젠 페트로비치]] 및 1993년 드래프트 픽 1장을 사들였으며, 캐딜락 앤더슨 및 1992년 드래프트 1라운드 픽 1장을 덴버의 테리 밀스랑 맞바꿨다. 1991년 드래프트에서 조지아 공대 출신 케니 앤더슨을 전체 2번으로 뽑았다. 이렇게 팀을 새로 짠 후 1991-92 시즌부터 3시즌 연속 플옵에 진출해 이웃 팀 [[뉴욕 닉스]]의 대항마로 주목받은 바 있었다. 특히 1992년 디트로이트 피스톤즈에서 성공을 거둔 [[척 데일리]] 감독이 온 뒤 팀은 점차 완성되어 가기 시작했다. 오프시즌에선 무키 블레이락 및 로이 힌슨을 애틀랜타 호크스의 루밀 로빈슨과 맞바꾸고 드래프트 픽 2장을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의 제이슨 윌리엄스랑 맞바꾼 뒤, 이탈리아 무대에서 뛰던 릭 마혼과 처키 브라운을 각각 FA로 영입하고 새크라멘토 킹스에서 방출된 드웨인 신치우스를 영입하는 등 전력 보강을 했다. 드라젠을 중심으로 케니 앤더슨과 데릭 콜먼[* 이 둘은 데뷔 초기만 해도 실력이 뛰어났으나, 전임 빌 피치 감독과는 사이가 안 좋았다.] 등의 기량을 끌어올려 강력한 수비와 스크린 플레이 중심의 공수전환이 빠른 오펜스를 바탕으로 상위권까지 도약하고자 했다. 정규시즌 초반 앤더슨이 손가락 부상을 입자 팀은 휴식 중이던 노장 버나드 킹과 모리스 칙스를 급히 수혈해서 숨을 돌렸고, 콜먼은 20득점 / 10리바운드, 앤더슨은 16득점 / 8어시스트[* 전년도는 7득점 / 8어시.]를 각각 기록하는 등 성과를 보여 43승 39패로 플옵에 나갔지만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에게 2승 3패로 졌다. 그러나 불행은 빨리 닥쳐왔다. 드라젠은 코치진들과의 갈등과 동료 선수들의 편견을 못 이긴 채 1992-93 시즌을 끝으로 그리스 파나시나이코스 농구팀으로 옮기려 했으나, 독일에서 교통사고로 숨을 거뒀다. 또한 콜먼은 거만한 기질 탓에 독불장군식 플레이와 락커룸에서의 트러블 등으로 사고를 많이 쳤고, 케니 앤더슨과도 볼 소유권을 다투는 등 엄격한 '심리학자' 데일리 감독조차 어찌하지 못할 정도로 선수진 사이에서 이기주의가 팽배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도 1993년 오프시즌 때 마이애미 히트의 케빈 에드워즈,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의 아몬 길리엄 등을 FA로 영입 후 CBA 팀 위치타 폴 텍산스의 데이비드 웨슬리까지 영입했다. 또한 샘 보위와 1998년 드래프트 2라운드 픽도 LA 레이커스의 벤와 벤자민과 맞바꿨다. 정규시즌 초반에는 크리스 모리스가 부상을 당하면서 안 좋게 시작했으나 동년 12월에 루밀 로빈슨을 샬럿 호네츠의 조니 뉴먼과 맞바꿔 숨통을 트였고, 43승 39패로 플옵에 또 나가 라이벌 뉴욕 닉스를 상대했지만 1승 3패로 스윕당했다. 1994년에 데일리 감독이 떠나자 하워드 대학교 감독이던 버치 비어드가 사령탑을 잡았고, 비어드 감독은 팀을 플옵 2회전까지 가게 하는 쪽으로 목표를 정했다. 트레이드 시장에서 샌안토니오 스퍼스에 있던 슬리피 플로이드를 FA로 영입하고 CBA를 전전하던 무명 선수 크리스 차일즈를 발굴했다. 또한 웨슬리는 보스턴으로, 뉴먼은 FA를 통해 밀워키로 각각 떠났다. 벤자민과 신치우스 등으로 이뤄진 엉성한 센터진을 보강코자 드래프트에서 나이지리아인 선수 잉카 다레(조지 워싱턴대)를 전체 14번으로 뽑았으나 듬직한 체격과는 달리 기술 수준이 딸려서 농구 전문가들 사이에 논란이 많았고, 정규시즌에서 아킬레스 파열로 3분밖에 못 뛰었다. 팀의 심장이던 콜먼이 부상으로 26경기 결장을 한 데다 에드워즈도 아킬레스건이 찢어져 14경기밖에 못 뛰는 등 여러 선수들이 부상에 시달렸다. 거기에 비어드 감독은 하워드 대학교에서 재직할 적 1992년 NCAA 전국대회 진출을 빼곤 임기 4년 내내 45승 69패를 기록하는 등 감독으로서의 자질 문제가 도마에 올랐는데, 그런 연유로 앤더슨과 콜먼은 공개적으로 버치 비어드 감독과 불화를 일으키는 등 삐걱거리며 30승에 그쳤다. 1995년 오프시즌 들어 팀은 다레에게 거액의 장기계약까지 체결하며 선수 생명을 연장코자 했고, 인디애나 페이서스의 번 플레밍을 FA로 영입한 뒤 벤와 벤자민을 확장 드래프트를 통해 밴쿠버 그리즐리스로 내보냈고, 드래프트에서 UCLA의 우승멤버 에드 오배넌을 전체 9번으로 뽑아 팀을 재건하려 했다. 그러나 다레는 허약한 패스 실력, 운동능력 부족 등으로 백업 신세가 됐고,[* 1998년 방출 이후 하부 리그를 전전하다 2004년 1월 9일 심장마비로 숨졌다.] 오배넌도 향수병과 무릎 부상 악화 등으로 제 기능을 못했으며 에드워즈도 무릎 부상으로 34경기밖에 못 나갔다. 더 나아가 콜먼은 11경기 출장에 그친 후 숀 히긴스, 렉스 월터스 등과 세트로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의 [[숀 브래들리]], 팀 페리, 그렉 그레이엄 등과 맞바꿔진 후[* 이후 그는 2005년 은퇴할 때까지 거의 매 시즌마다 부상의 악령에 시달리는데, 90년대 가장 유명한 유리몸 중 하나가 콜먼이었다. 그 불행은 은퇴 뒤에도 이어져 그토록 야심차게 시작한 디트로이트의 부동산 투자 사업마저 2007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건과 디트로이트의 경기 침체 등으로 타격을 맞아 엄청난 손실을 입은 후 2010년에 파산 신청을 했다.], 앤더슨도 1996년 1월에 샬럿 호네츠의 켄달 길 및 칼리드 리브스와 맞바꿔지자 데뷔 4시즌차 선수 제이슨 윌리엄스에게 중심이 넘어갔다. 길리엄과 차일즈, P.J. 브라운, 브래들리 등도 최선을 다했으나 최종 성적은 30승 52패였다. 1996년에 아우프지엔은 헨리 타웁[* 조 타웁 전 구단주의 형. ERP 소프트웨어 전문 회사 '오토매틱 데이터 프로세싱(ADP)'의 창업주다.]에게 회장직을 넘겼고, 윌리스 리드 운영부사장 겸 단장을 스카우트부문으로 이동시키고 워싱턴 불리츠 단장이던 존 내시를 새 단장직에 앉혔다. 뒤이어 비어드 감독도 경질하고 매사추세츠 대학교에서 주가를 올리던 존 칼리파리를 총무부장 겸 감독으로 불러 그에게 전권을 맡겼다. 동년 드래프트에서 빌라노바 대학교 출신 케리 키틀스를 전체 8번으로 뽑은 후 워싱턴 불리츠로부터 로버트 팩을 샀다. 또한 토니 마센버그, 자비에 맥대니얼, 데이빗 벤와 등 3명도 FA로 영입했다. 그러나 시즌 초반부터 연패를 거듭하자 1997년 2월에는 브래들리, 오배넌, 팩, 리브스 4명을 댈러스 매버릭스의 샘 카셀, 짐 잭슨, 크리스 개틀링, 조지 맥클라우드, 에릭 몬트로스 5명과 맞바꾼 후, 이 중 맥클라우드를 미래의 드래프트 2라운드 픽과 묶어 LA 레이커스의 조 클라인 및 드래프트 1라운드 픽 1장과 맞바꿔 전력 보강을 시도해 봤다. 이에 켄달 길이 최선을 다했지만 26승 56패로 전 시즌 대비 -4패를 했다. 1997년 오프시즌 들어 로고를 비스듬히 선 방패 형태 등으로 변경하며 팀 컬러도 기존의 흰색/빨강/파랑 기반에서 흰색/회색/짙은 파랑 및 빨강 등으로 바꿨고, 드래프트에선 전체 7번으로 빌라노바대 출신 팀 토마스를 뽑았지만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가 2번으로 뽑은 키스 밴혼(유타대)을 루셔스 해리스, 마이클 케이지, 돈 맥린 등과 세트로 묶어서 넘겨받았다. 또한 밀워키 벅스의 셔먼 더글러스도 FA로 영입했다. 정규시즌 초반부터 젊은 선수들을 바탕으로 순항을 시작해 시즌 도중인 1998년 2월에는 다레와 데이빗 벤와, 케빈 에드워즈 등 벤치 선수 3명을 올랜도 매직의 로니 세이컬리 및 브라이언 에반스와 맞바꿨고, 거기에 케리 키틀즈, 켄달 길, 제이슨 윌리엄스[* 무려 해당 시즌 리바운드왕이자 첫 올스타 출전의 기쁨도 누렸다.] 등의 선수들이 전성기에 오르고 밴혼이 19점이나 올린 데 힘입어서 전 시즌보다 16승이 더 오른 43승 39패를 찍어 플레이오프에 나섰지만, 시카고 불스에게 3전 전패로 스윕당했다. 1998년에 시카커스 세븐이 레이 챔버스, 루이스 카츠, 핀 웬트워스, 스탠리 게일 등으로 이뤄진 투자 그룹에게 팀 경영권을 넘겼으나 이듬해 초에 뉴욕 양키스 구단주 [[조지 스타인브레너]]와 같이 투자해 통합운영사 '양키네츠'가 출범됐다. 다른 한편 팀은 밀워키 벅스로부터 제레미 파익을 사는 등 팀 개편을 해도 팀 성적은 전 시즌 대비 추락을 거듭했고, 그 타개책으로 1999년 3월 밀워키 및 미네소타와 삼각 트레이드를 벌여 샘 카셀을 밀워키로 팔고 미네소타로부터 [[스테판 마버리]]를 사기도 했지만 16승 34패로 주저앉았다. 도중에 칼리파리가 감독직에서 잘려 돈 케이시 코치가 감독대행을 맡았다. 1999년 오프시즌 때 제이슨 윌리엄스가 장기 계약을 맺었으나 연습시합 도중 마버리와 부딪혀서 무릎 골절상을 당해 시즌 아웃됐고,[* 이후 그는 무릎 수술을 받는 등 여러 치료를 받았지만 효과가 없어서 2000년 6월에 은퇴 선언을 했다. 2002년에 자신의 운전기사 거스 크리스토피를 쏴 죽인 뒤 친구들과 함께 사건을 은폐하려다가 2급 살인죄로 기소됐다가, 법정에서 선수 시절 벌어들인 돈을 변호사 선임비로 써서 2004년에 살인만 무죄로 판결받았다. 이에 크리스토피의 유족이 항소하면서 그의 삶은 더더욱 추락했고, 2009년에는 이혼 소송을 맞으며 뉴욕 맨하탄의 한 호텔에서 자해 및 약물자살 시도를 했다가 경찰에게 테이저건으로 제지당했으며 며칠 후에는 노스캐롤라이나 주 롤리의 한 술집에서 온갖 난동을 부리며 또 검거당했다. 2010년 음주운전 혐의로 재차 검거된 후 8년 전에 있었던 그 살인 혐의의 일부를 시인하면서 5년 형을 선고받았다. 이듬해에는 음주운전 건까지 포함해 형이 1년 더 불어났다가 2012년에 풀려났다.] 대신 마버리와 켄달 길 등이 메꿨지만 전 시즌보다 조금 오른 31승 51패로 플옵을 못 갔다. 이 시절 닉스는 94년, 99년 파이널 진출, 00년 동부 파이널 진출 등 강팀으로 면모를 뽐냈기에 안 그래도 은근히 무시당하는 면모가 있는 뉴저지의 굴욕은 절정이었다. 이런 분위기가 [[니콜라스 케이지]] 주연의 2000년작 영화 <패밀리맨>에 나오는데, 주인공이 운명이 바뀌어 뉴욕에 사는 성공한 비지니스맨에서 뉴져지에 사는 평범한 타이어 세일즈맨으로 바뀐다. 새로운 운명에서 친구들인 뉴저지 사람들이 "니들 어젯밤 경기서 키스 밴혼[* 1997년 드래프트에서 [[팀 던컨]]에 이은 2순위 선수. 큰 키에 다재다능한 백인빅맨으로 재능이 있었지만 큰 경기에서 매우 약하고 너무 소프트해 대성하지 못했다.] 봤냐?" "알아, 33점이라니!" "그 녀석이 네츠를 우승으로 이끌거야"라는 대화를 하는데 주인공이 무심코 "네츠? 걔들 형편없잖아? (Nets? They suck?)"이라고 해 갑분싸가 됐다가 "하지만 이길 때도 됐지! 그럼!(But they're due!)"라고 해 분위기를 수습한다. 위와 같은 굴곡진 행보 탓에 제이슨 키드 영입 전까지 부진한 나날들을 보내게 되며, 팬들 입장에선 이러한 암흑기를 [[http://legacy.www.hani.co.kr/section-014006001/2001/11/014006001200111121405007.html|'Dr.J의 저주']]라 부르며 회자해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